폴 발레리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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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조직된 무관심이다.
미소는 체계다.
배려는 예측이다.

나쁜 순간들은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보여주지 않는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정말 절대적으로 나쁜 순간들은 포착할 게 아무것도 없는 순간들, 우리가 정신의 하늘로 가져갈 만한 어떤 것도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그런 순간들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순간으로 보인다.

옴짝달싹 않는 이 느낌, 소파에 들러붙었다는 이 확신은—아마도—바로 지구의 움직임에 실려가는 느낌이리라. 이 휩쓸림의 느낌을 우리는 휴식이라 부른다.

때때로 분석은 전체로는 그나마 견딜 만했던 것의 세부 사실에 혐오를 느끼게 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산다는 건 동일한 결과를 얻게 하는 분석 방법이다.

참으로 올바른 표현(표정으로건 언어로건)은 가장된 것, 다시 말해 준비된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어떤 눈길은 나의 의문 품은 비전에 참으로 꼭 들어맞는 조각이어서 나는 그의 모든 생각과 저의를 알아맞힌다. 마치 그것이 그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기라도 한 것처럼.

욕설에도 찬사에도 휘둘리지 않는 이들, 어조, 권위, 폭력, 모든 외적인 것에 동요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만 글을 쓰고 작업할 것.
‘똑똑한’ 독자를 위해 글을 쓸 것. 과장에도 어조에도 압도되지 않는 이를 위해.
당신의 생각대로 살든지 아니면 그 생각을 파괴하거나 거부할 이를 위해—당신이 그 생각에 대한 전권을 부여할 이를 위해. 건너뛰고, 지나가고, 따라가지 않을 권리를 소유한 이, 반대로 생각할 권리를, 믿지 않을 권리를, 당신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 이를 위해.

‘행동’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몰라야 하는지!

모든 인간은 수많은 경이로운 것들을 알면서 스스로 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알기? 이 단순한 탐구만으로도 철학은 고갈된다.

자기 자신이 돼라...! 그런데 자기 자신이라는 게 될만한 가치가 있긴 한 건가?

인간은 긍정할(표현할) 줄 모르는 것을 부인하려 든다.

아는 것을 낯선 것으로 바꾸고, 삶을 꿈으로,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눈을 조금 고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눈길에 상상력이 부족하고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해서 동화와 여행과 비범한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